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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최준석 건축사(나우랩건축사사무소 대표)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도시 풍경을 가만히 서서 관찰해 보자.
1층을 기둥만으로 비워두어 주차장이나 보행로로 쓰는 다세대주택이나 빌라 건물들,
풍부한 햇살과 풍경을 받아들이는 대형 카페의 거대한 창문, 오피스 빌딩이나 아파트 옥상에
근사하게 조성된 인공 정원, 비내력 벽을 자유롭게 철거한 후 넓은 공간을 만드는 다양한 리모델링까지…
2026년 우리의 도시에서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건축적 해법들은 언제, 어디에서 처음 시작되었을까?
현대적 건축으로의 역사적 전환, 빌라 사보아
1931년 프랑스 파리 근교 프와시(Poissy) 푸르른 언덕 위, 백색 상자하나가 가느다란 기둥에 얹혀 있는
형상으로 지어졌다.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설계한 ‘빌라 사보아(Villa Savoye)’
다. 당시 보험업으로 성공한 사보아 부부가 주말마다 머물 별장으로 지은 집인데,
100년이 지난 현재는 세계 곳곳에서 건축학도와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지역 명소가 되었다.
집의 정면이 어디인지 현관은 또 어디인지 선뜻 알기 어려운, 지금 기준으로 봐도 낯선 모양의 집.
빌라 사보아는 단순한 스타일 추구를 넘어, 우리가 사는 현재 도시와 건축의 기본 틀을 제시한 역사적
전환점이라 할 만한 건축이다.
20세기 초까지 인류는 두꺼운 돌과 벽돌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집을 지었다.
벽 자체가 지붕과 각층 바닥의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는 구조다.
벽에 구멍을 크게 뚫으면 건물이 무너지므로 창은 좁은 세로 모양일 수밖에 없었고,
실내 구획도 벽의 위치를 따랐다. 내부는 어둡고 무거운 동굴 같은 분위기를 피하기 어려웠다.
르 코르뷔지에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이 문제를 풀었다. 외벽이 지탱하던 하중을 얇고 강한 기둥이 대신
받는 기둥+바닥 구조로 혁신했다.
기둥이 무게를 지탱하자 벽체는 구조에서 해방되어 외피나 칸막이 같은 가벼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에 르 코르뷔지에는 빌라 사보아를 통해 ‘현대 건축의 5원칙’을 선보였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그의 유명한 어록은 이전 건축의 무겁고 번거로운 구조와 장식을 털어내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공간의 기능성과 자유를 추구하자는 선언이다.
재미있는 점은 100년 전 그가 빌라 사보아에서 실험했던 5가지 요소들이, 지금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
도시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르 코르뷔지에의 5원칙
첫 번째 요소 ‘필로티(Pilotis)’는 건물을 띄어올려 땅을 비우게 하는 것이다.
사보아 부부가 몰던 자동차의 회전 반경과 비 맞지 않는 진입 공간을 확보하려 도입했는데,
지금은 다세대 건물이나 상가주택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두 번째 ‘옥상정원(RoofGarden)’은 1층이 자동차 공간으로 쓰이면서 부족해진 녹지를 지붕 위에
되살린다는 발상이다. 아파트 단지와 쇼핑센터의 옥상 정원, 테라스로 이미 보편화 되었다.
세 번째는 ‘자유로운 평면(Free Plan)’으로, 하중을 기둥이 담당하면서 벽체는 구조와 상관없이 공간을
나누는 도구가 되었다. 아파트 리모델링에서 방을 넓히거나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 구조를 바꾸는 편리함이
여기서 왔다. 네 번째 ‘수평창(Ribbon Window)’은 창의 형태와 크기에 제한이 사라졌다는 의미로,
실내에서도 자연 채광과 풍경을 원하는 만큼 갖게 했다. 마지막 ‘자유로운 입면(Free Facade)’은
앞의 네 가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우리 주변 건물들이 유리를 통째로 둘러싸거나 화려한 마감재로 개성 있는 외관을 만들게 된 시작점이다.
하지만 혁신적 걸작에도 옥에 티 하나쯤은 있는 법.
방수 기술이 충분치 않던 당시에 평평한 옥상은 비만 오면 문제를 일으키는 골칫거리였다.
게다가 장식 없는 모던스타일에 맞게 시공된 처마 없는 창문들은 비바람이 치는 날마다 틈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천하의 르 코르뷔지에도 법적 소송을 피할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사보아 가족이 피난을 떠나며
소송은 흐지부지된다. 전쟁 중 창고와 군사 시설로 쓰이며 폐가로 방치되었던 빌라 사보아는
전쟁이 끝난 후엔 철거 위기에 몰렸으나 후대 건축가들의 강력한 탄원으로 1965년 프랑스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16년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위대한 건축은 인류에게 공간을 보는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
그틀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방식과 사회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빌라 사보아는 건축주에겐 골치 아픈 문제를 안겼던 애증의 집이었다.
하지만 인류에겐 이전엔 없던 풍요롭고 경쾌한 공간적 자유를 선사한, 현대 건축의 신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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