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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시 향토유적

전주이씨 밀성군(세종5남) 묘역 및 신도비(향토유적 제2호) 사진
전주이씨 밀성군(세종5남) 묘역 및 신도비(향토유적 제2호)

밀성군(密成君, 1430∼1479)은 조선조 세종의 열두번째 아들로 이름은 침이다. 자는 문지(文之)이고 어머니는 신빈김씨(愼嬪金氏)이다. 신도비(神道碑)란 대개 무덤 동남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강조능(陵), 원(園), 묘(墓)의 차이점은?
조선시대의 묘제에 있어 왕실의 묘는 능, 원, 묘로 구분된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고 [원]은 왕의사친(私親) 왕세자와 그 비의 무덤, [묘]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으로 위계에 따라 그 명칭을 다르게 정하였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319-10
사충서원(노론) 및 묘정비(향토유적 제3호) 사진
사충서원(노론) 및 묘정비(향토유적 제3호)

신임사화 때 희생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4대신을 제향하기 위해 1725년(영조1년) 과천 노량진(지금의 노량진역)에 설립된 서원이다. 이들은 영조를 옹립하려다 소론의 무고로 모두 사사되었던 사람들인데, 영조는 즉위하자 이들을 배향하기 위해 사충서원을 건립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1727년에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4대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서원도 철폐하였다. 그 후 1740년 4대신이 다시 충신으로 판정되었으나 서원은 곧바로 복설되지 못하다가 1756년에야 복설되면서 사충서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충서원은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 봄 사충서원 자리가 철도용지로 편입되게 되어 당시 고양군 한지면 보광동(현재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건하였지만 한국전쟁 때 파괴되고 1968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중건하였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하남대로232번길 89-8(상산곡동)
구산성지(향토유적 제4호) 사진
구산성지(향토유적 제4호)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거북 구(龜)자와 뫼 산(山)자를 써서 구산이라고 불리는 곳에 103위 성인 중 한 분인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여덟 분의 순교자가 묻힌 성지가 있다. 구산성지와 구산성당은 조경이 뛰어나 드라마, CF, 영화촬영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아늑한 분위기에서 고난과 영광의 발자취를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많은 카톨릭 신자와 관광객이 자주 찾는다. 특히 구산마을은 그들의 후손들이 대대로 순교자 묘소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200여 년 동안 성지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지켜가고 있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북로 99(망월동)
교산동 건물지(향토유적 제5호) 사진
교산동 건물지(향토유적 제5호)

교산동 건물지는 백제의 하남 위례성과 관련된 건물지로 오랫동안 주목을 받아오던 중 1999년부터 2002년에 걸쳐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의 하남 위례성과 관련된 유구 및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통일신라 ~ 조선시대에 걸쳐 장기간 사용되었던 건물지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지에서는 통일신라 말기 유물에서 조선시대 유물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 중 건물지의 성격과 관련되는 ‘관(官), ’광주객사(廣州客舍)‘ 등의 각종 명문와를 비롯하여 상품 백자 및 제기들이 출토되었다. 검단산의 한 줄기인 객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건물지는 북쪽을 제외한 동/서/남쪽에 대형 건물지가 ‘ㄷ’자 형태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외곽으로 토루가 둘러싸고 있다. 유적의 성격은 일단 고려시대 광주의 주치(州治)와 관련된 관영건축물로 추정된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78-3 일원
운산군(밀성군 장남) 묘역 및 신도비(향토유적 제6호) 사진
운산군(밀성군 장남) 묘역 및 신도비(향토유적 제6호)

운산군 (雲山君) 이계(李誡, 1453, 단종 1 ~ 1510, 중종 5)는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이다. 자는 신옹(愼翁),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조의 귀여움을 받았으며, 세조가 직접 사서(史書)와 경서(經書)를 가르쳤다. 1464년(세조10)에 운산군(雲山君)에 봉해졌으며 이후 흥록대부, 흥록상전 종부시(興祿常典宗簿寺)의 도제조(都提調)에 이르렀다. 1506년(연산군12) 중종반정 때에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509년(중종4) 6월 종친부 · 종부시 · 사옹원의 제조가 되었다. 첫째 부인 주부 곽득륜(郭得倫)의 딸과 재취 김제군수 정자숙(鄭自淑)의 딸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철성군(鐵城君) 이갱(李戡), 둘째 아들은 고성군(固城君) 이강(李鋼), 셋째 아들은 광성부정(匡城副正) 이전(李銓)이다. 큰딸은 파천군(坡川君) 윤탕노(尹湯老)에게, 둘째 딸은 참봉 조신충(趙信忠)에게, 셋째 딸은 유학 송세영(宋世英)에게 시집갔다. 1518년(중종 13) 4월 28일 남곤(南袞)이 찬한 신도비가 세워졌다. 신도비는 높이 300㎝, 폭 82㎝, 두께 23㎝이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산4-1
광주이씨 시조비 묘역(향토유적 제7호) 사진
광주이씨 시조비 묘역(향토유적 제7호)

인화이씨(仁華李氏)는 광주이씨의 시조인 이당(李唐)의 부인이다. 이당은 고려 말 국자감생원(國子監生員)을 지냈고, 조선조에서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자의금부사의 증직을 받았다. 이씨부인과의 사이에 인령(仁齡), 원령(元齡), 희령(希齡), 자령(自齡), 천령(天齡) 등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특히 둘째 아들 원령은 둔촌(遁村) 이집(李集)으로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 判典校寺事)를 지냈는데, 고려시대 삼은으로 유명한 목은 이색(李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도은 이숭인(李崇仁) 등과 교류를 하였고, 학문에 있어서 명성이 높았다. 후손 가운데 조선조 문과급제자가 186명에 달하며, 이극배(李克培), 이준경(李浚慶), 이덕형(李德馨) 등 상당수가 영의정에 이르렀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때에 묘소를 잃어버렸다가, 1754년(영조30)에 14대손 창하가 이곳에 묻혀있던 비석을 발견하여 지금의 묘소를 찾게 되었다. 이 묘역은 600년 이상 된 묘소로서, 옛 광주군의 토성인 광주이씨 문중의 시조비라는 특징과 하남시 여우산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풍수상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 산24-1
유홍신도비(향토유적 제8호) 사진
유홍신도비(향토유적 제8호)

유홍(兪泓, 1524~1594)은 증 영의정 유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령 남씨로 증 사복시정 남충세(南忠世)의 딸이다. 1549년(명종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삼사(三司)를 거쳐 충청/전라/경상/함경/평안 등 5도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22)에는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광국일등공신(光國一等功臣)으로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시종하고, 도체찰사로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여 왜군과 싸웠다. 왜군이 후퇴하자 먼저 서울로 올라와 관아와 도성을 정리한 공으로 1594년(선조27) 좌의정을 제수 받았다. 슬하(膝下)에는 대술(代述), 대건(大建), 대진(大進), 대일(大逸) 등 4남과 2녀를 두었다. 시문에 능했고 장서가 많기로 유명하다. 호는 송당(松塘), 본관은 기계(杞溪), 시호는 충목(忠穆)이며,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송당집(松塘集)이 있다.
1813년(순조13)에 세워진 신도비는 이조판서 장유(張維)가 짓고, 자손인 유한지(兪漢芝)가 썼는데, 예서체는 서예가들에게 높이 평가되어 찬사를 받고 있다. 신도비는 장방형의 대석위에 신석(身石)을 세우고, 비두에 개석(蓋石)을 얹고 있으며, 높이는 167㎝, 폭 60㎝, 두께 54㎝이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동 261
유홍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8-1호) 사진
유홍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8-1호)

유홍(兪泓, 1524~1594)의 묘는 1595년 2월 경기도 고양 선영에서 장사를 지내고, 1612년 하남시 검단산으로 이장하였다. 봉분 둘레는 화강암제 호석으로 둘러져 있고, 묘의 형태는 방분(사각묘)이다. 묘표 뒷면에는 「崇禎後 二十八年 癸卯十一月立」이라 하여 이 비의 건립연대를 알 수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상석 양 옆으로 기단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의 방향은 정남향이며, 주위로 화표 2기와 동자석 2기, 문인석 2기, 봉분 뒤쪽에는 산신제석과 향석이 있으며, 묘역에서 남서쪽 300m정도 거리에는 유홍 신도비가 있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동 산 18-1
전주이씨 선성군(정종4남)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9호) 사진
전주이씨 선성군(정종4남)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9호)

선성군(宣城君) 묘역은 조선 제2대 국왕 정종의 넷째 아들인 선성군 이무생(李茂生)과 그의 부인 정씨(鄭氏)/김씨(金氏)/한씨(韓氏)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인 병산군(屛山君)/지산군(知山君)/풍산부령(豊山副令)/이원군(利原君)/대구도호부사 이준도(李遵道)/동복공(同福公) 등 선성군파 종문(宗門) 10여기의 묘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선성군 이무생은 1425년(세종 7) 중직대부(中直大夫) 정윤(正尹), 1432년(세종 14) 원윤(元尹)의 작호를 받았으며, 1454년(단종 2) 중의대부(中義大夫) 선성군에 봉군(封君)되었고, 1872년(고종 9)에 상보국숭록대부 영종정경(上輔國崇祿大夫領宗正卿)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정(良靖)이다. 선성군 묘역에는 선성군 신도비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된 묘갈(墓碣)/장명등(長明燈)/상석(床石)/혼유석(魂遊石)/양석(羊石)/망주석(望柱石)/동자상(童子像)/고석(鼓石)/향로석(香爐石)/문인석(文人石) 등 수많은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선성군신도비의 비문은 이명상(李明翔)이 짓고, 윤용구(尹用求)가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은 민병석(閔丙奭)의 솜씨이다.
또한 이준도(李遵道)의 묘갈은 윤근수(尹根壽)가 비문을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써 더욱 돋보인다. 이 묘역은 조선시대 왕자 묘의 규모나 규범을 참고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며, 이곳의 석물들은 조선시대 석물의 변천과 형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 산 64
현민 유진오 박사 생가터(향토유적 제10호) 사진
현민 유진오 박사 생가터(향토유적 제10호)

현민 유진오박사(1906∼1987) 생가는 60년 전에 멸실되어 현재 집터만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의 전언(傳言)이나 대지입지 여건상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ㄱ”자형 민가(民家)이며 5칸 규모의 동향(東向) 초가집으로 추정된다. 북쪽 담은 흙담이고 서쪽과 동남쪽 담은 싸리담으로 되어 있었으며, 안채의 전면과 대칭 형태였던 대문은 싸리문이었다고 한다. 집 동북쪽에 화장실이 담과 맞다 있었고, 우물은 현재 남쪽으로 약 50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 공동 우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 512-2
박강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1호) 사진
박강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1호)

박강(朴薑)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1406년(태종 6) 좌의정을 지냈던 박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444년(세종 26)에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된 후 군기감정(軍器監正), 공조참의를 지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황해도도절제사, 이듬해에는 황해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강원도관찰사, 중추원부사가 되었고, 1455년(세조 1)에는 세조가 즉위하는데 협력한 공으로 추충좌익공신 동지중추원사 금천군(錦川君)에 봉해졌으며 청백리에도 선정되었다. 1457년(세조 3)에는 지중추원사가 되었고 1460년(세조 6) 왕을 호종하다 순직하였다. 시호는 세양(世襄)이다. 인종 때 증손녀인 인성왕후의 추은(推恩)으로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추증되었고 그의 부인인 통진현부인 순흥안씨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현재 묘역에 조성되어 있는 석물들 중 박강 묘표, 순흥안씨 묘표 및 문인석 4기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서 당시 유행하던 석조미술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산 5
박치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2호) 사진
박치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2호)

박치(朴緇,1441~1499)는 반남 박씨로 형조·공조·정랑 등 당시 행정 실무관청의 중견관리를 거쳐 청요직의 사헌부 집의에까지 올랐던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신료였다. 묘역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박치와 그의 부인 창녕 성씨의 묘로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묘표와 향로석, 혼유석, 좌·우 문인석과 망주석, 그리고 2000년에 세운 비좌 개석의 묘표가 배치되어 있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산 20-1
열녀 완산이씨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3호) 사진
열녀 완산이씨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3호)

열녀(烈女) 완산이씨는 정종의 15번째 아들인 무림군(茂林君) 이선생(李善生)의 손녀이며, 명천도정(明川都正) 이장손(李長孫)의 딸이다. 영의정 성준(成俊)의 아들인 성경온(成景溫)에게 출가하여 1남 3녀를 낳았다. 성경온은 1483년(성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후, 1503년(연산 9)에 문과별시에 합격하여 공조정랑에 올랐으나, 1504년(연산군 10) 아버지 성준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류되어 교살되자 성경온도 유배되었다가 자결하였다. 광주 정림산(井林山)에 장사지냈는데, 부인 완산이씨가 묘 옆에서 여막살이를 하며 조석(朝夕)으로 제수를 손수 올렸다. 상을 마친 후에도 평생 흰옷을 입고 고기를 입에 대지 않으니 중종이 그의 절행을 가상히 여겨 정려(旌閭)를 내렸다. 완산이씨의 아들 성남(成覽)은 홍달정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4녀를 낳아 후사가 없다. 3녀 중 맏딸이 진사 구원지(具元之)에게 출가하여 사위 구원지가 둘째 아들 구징(具徵)으로 하여금 외손봉사하게 하였다. 그런 연유로 완산이씨 묘 아래로는 외손봉사를 한 구징의 묘가 위치하였고, 그 아래로 구징의 장남 구효연의 묘가 위치하게 되었다. 완산이씨의 묘는 성경온과 합장한 원형의 봉토분이며 석물은 성경온의 묘갈과 망주석 1쌍이 남아 있다. 성경온의 묘갈은 신용개(申用漑)가 비문을 짓고, 김희수(金希壽)가 글씨를 썼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감일동 산 59-50
이종생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4호) 사진
이종생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4호)

이종생(李從生)은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1423년(세종 5) 아버지 증 병조판서 함평군 이극명(李克明)과 어머니 통사랑(通仕郞) 정혼(鄭渾)의 딸 사이에서 태어나 1495년(연산군 1)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광주 서쪽 감천(甘泉)에 장사지냈다. 자는 계지(繼之)이고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부인은 예문관 직제학 박희중(朴熙中)의 딸 진원박씨이다. 이종생은 1460년(세조 6) 별시 무과에 합격하여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10월 북정도원수 신숙주(申叔舟)의 군관으로 공을 세워 선략장군(宣略將軍)이 되었으며, 1466년(세조 12)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함성군(咸城君)에 봉해진 후 1473년(성종 4) 내금위장, 1485년(성종 16) 경상우도병마절도사, 1491년(성종 22) 겸사복장, 1495년(연산군 1)에는 부총관이 되었다. 묘소는 부인 박씨가 위쪽에 자리 잡았고, 아래쪽에 이종생의 묘를 배치하였으며, 그 아래쪽에는 이종생의 말 무덤인 마총(馬塚)이 위치하고 있다. 이종생의 묘에는 1497년(연산군 4)에 세운 방부개석(方趺蓋石 : 사각형의 받침돌과 지붕모양의 덮개돌)의 묘표와 문인석 1쌍이 있고, 부인 박씨의 묘에는 방부하엽(方趺荷葉 : 사각형의 받침돌과 화관형의 몸돌)의 묘표와 문인석 1쌍이 있다. 이와 같이 개인마다 석물을 조성한 것은 조선 전기의 방식으로 묘제 연구나 석물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산120-1, 산120-4
함평이씨 포장공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5호) 사진
함평이씨 포장공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5호)

포장공(捕將公) 이백복(李伯福, 1555~1632)은 함평이씨(咸平李氏) 16세, 자는 여석(汝鍚)으로 무괴(武魁, 무과장원)로 입격하였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성공 후, 공신(功臣)에 책록된 조선 중기 유력 무신(武臣)이다. 포장공 이백복은 400여 년 간 하남시에 동족집단을 이뤄 세거하는 함평이씨의 입향조(入鄕祖)로서, 공의 묘역은 후손들의 역사적 배경이자 상징적 역할을 해왔으며, 종중은 현재까지 매년 10월 묘역을 찾아 시향을 올리고 있다. 특히 공의 묘소 인근은 10대손 이대헌(李大憲, 1883~1944, 교산동 구장, 광주군 신간회 간사)이 주동한 광주지역(現하남시) 3.1만세운동의 시발지로서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또한 묘역은 세종대왕(世宗, 1397~1450)의 천릉 후보지로도 거론된 길지로 알려져 있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천현동 산13-6번지
안산김씨 연성군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6호) 사진
안산김씨 연성군 묘역 및 석물(향토유적 제16호)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은 고려 1345년(충목왕 1년)에 태어나 1419년(세종 1년)까지 74세를 살았다. 일찍이 고려 때에 벼슬하였으나, 새 왕조 창업에 찬성하고 이성계를 지지하였다. 용맹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개국 후 삼군절도사를 거쳐 이조전서를 지냈으며, 1410년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조선왕조 창업 및 왕자의 난 진압 공적으로 공신에 책록(策錄) 되었다. 1667년(숙종 8년)에 지어진 위정사(威靖祠, 충북 문화재자료 제12호)에서는 현재까지도 후손들이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를 모시고 있다. 묘역에는 조선 전기·후기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묘표, 장명등, 석상 등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1863년(철종 14년) 예조판서 신석우(申錫愚)가 찬하고, 오위도총부도총관 홍현주(洪顯周)가 쓴 신도비는 유교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 주소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산7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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